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그래뉴 학살 (문단 편집) == 상세 == 그래뉴 전투에서 끈질기게 저항한 끝에 미군 제507공수연대는 전투에서 15명의 전사자를 내면서 수백명의 SS를 사살했으나 탄약이 부족해지자 어쩔 수 없이 후퇴하게 된다. 군의관 에이브러햄 소피안 [[대위]]와 거동이 불편한 중상자들은 그들이 임시 구호소로 사용한 [[교회]] 건물에 [[백기]]를 걸고 [[독일군]]에게 [[항복]]했다. 총 17명의 미군들이 포로로 붙잡혔으며 소피안 대위와 휘하 2명의 [[의무병]]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부상병이였다. [[독일]]이 서명한 [[제네바 조약]]에 따라 이들은 엄연히 [[포로]]로써 보호받을 권리가 있었고 소피안 대위도 들이닥친 독일군에게 대원들 대부분이 부상자라는 이유에서 인도적인 포로 대우를 호소했으나 국제조약을 장식으로 여기던 SS에게는 소용이 없었고 더불어 미군의 끈질긴 저항에 수백명의 사상자를 내며 졸전을 벌였던 SS는 보복으로 붙잡은 포로들을 두 무리로 나누어 [[후방]]에 인계하지 않고 [[학살]]했다. 첫 번째 무리에 속한 5명의 포로들은 마을 인근 연못으로 끌고 가서 총검으로 찔러 죽였고 시신은 [[연못]] 바닥에 던졌다. 이후 이 시신들은 마을 주민들에 의해 수습되었다. 두 번째 무리에 속한 9명의 포로들은 르 메닐-앙고(Le Mesnil-Angot) 마을 근방의 평원으로 압송되었고 독일군은 그곳에서 포로들에게 직접 그들의 무덤이 될 구덩이를 파게 강요했고 이후 구덩이가 모두 파지자 독일군은 포로들을 무릎 꿀힌 뒤 한명 한명씩 등 뒤로 총상을 가해 처형하였다. 이후 일부 독일군은 처형된 미군 포로의 시신에서 [[군화]]를 포함한 쓸모있을 만한 보급품들을 가져갔다.[* 당시 독일군 사이에서는 전투 중 사살했거나 포로로 잡았다가 처형한 미군의 시신에서 외투, 장화 등의 보급품을 취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말메디 학살]]과 발하우젠 학살을 포함해 독일군이 미군 포로를 학살하는 사건마다 빼놓지 않고 일어났다. 이 때문에 미군의 보급품을 지니고 있다가 미군에게 포로로 잡힌 독일군은 심하면 그 자리에서 [[즉결처분]] 당하거나 운 좋으면 [[구타]] 등의 가혹행위를 당하고 목숨만 부지했다. 이는 영화 [[퓨리]]에서도 묘사된 바 있는데 포로로 잡힌 독일군 병사가 미군 외투를 입고 있었다는 이유로 즉결처분당한다.] 부상을 입지 않은 상태에서 포로로 잡힌 소피안 대위와 그의 [[의무병]] 2명은 바로 처형되지는 않았으나 독일군에게 억류되어 [[고문|몇 시간 동안 정보 수집을 위한 심문을 받은 뒤]] 근방의 초원에서 총살형으로 처형되었다.[* 이들의 시신은 길게 자란 풀에 가려진 탓에 1945년 3월까지 발견되지 않았으나 이후 미군에게 수습되어 본국으로 이송되었다.] 이리하여 총 17명의 미군 포로들이 독일군에게 학살당했다. SS의 광기는 전쟁포로 학살에 그치지 않았고 미군 협력자들을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인근 마을을 습격하여 프랑스 마을 주민 44명을 학살하고 그들의 시체를 불태웠으며[* 일부 주민들은 미처 건물에서 빠져 나오지 못해 산 채로 타 죽기도 했으나 SS는 당연히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방화]], [[약탈]], [[강간]]을 자행하여 마을을 초토화하였다. 이러한 독일군의 만행으로 159채에 달하는 가옥이 전소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